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턴 공방전 (문단 편집) == 전투 경과 == 1780년 3월 초, 링컨 소장은 영국군이 찰스턴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자 [[조지 워싱턴]]이 일찍이 급파한 이삭 후게르 장군에게 여러 연대와 500명의 기병대를 맡기고 찰스턴에서 쿠퍼 강 상류로 30마일 떨어전 몽크스 코너로 가서 적이 북쪽에서 찰스턴으로 내려오는 경로를 차단하게 했다. 후게르의 나머지 병력 2,600명은 2,500명의 민병대와 함께 약 3마일의 전선 및 요새를 방어했다. 이윽고 3월 말, 영국 군함이 찰스턴 하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륙군은 쿠퍼 강 하구로 이동했고, 몇 척의 군함과 민간 선박들이 강 입구를 가로질러 침몰했으며, 찰스턴에서 슈트 폴리 아일랜드까지 이어지는 로프를 설치해 적 함대가 강을 거슬러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또한 미군 군함 다수는 대포를 육지로 보내 영국군이 상륙시 화력을 집중하게 했다. 3월 29일, 클린턴 장군의 영국군이 애슐리 강 남쪽 둑에서 건너서 목진지로 진군했고, 대륙군 요새에서 약 1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찰스턴을 에워싸기 위한 참호 공사를 개시했다. 그리고 4월 8일, 영국 함대는 몰트리 요새를 지나 제임스 섬과 찰스턴 사이의 하구에 정박했다. 4월 10일, 포대 설치가 완료되자, 클린턴은 링컨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4월 13일, 영국군 포대는 도시를 향해 대포를 발사했다. 영국군의 포격은 자정까지 계쏙되었고 마을 곳곳에 화염에 휩싸였다. 다음날, 링컨은 고위 장교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상황이 절박하다고 보고 찰스턴을 포기하는 걸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맥킨토시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찰스턴을 떠나 쿠퍼 강 동쪽 방면으로 이동시킬 것을 촉구했지만, 링컨은 떠날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길 꺼렸다. 그사이 배내스터 탈턴 대령이 지휘하는 영국군 기병대는 몽크 코너에 주둔한 대륙군을 향해 이동했다. 영국 말들은 수송 도중 헤테라스 곶에서 불어닥친 폭풍으로 대부분 죽었지만, 타레톤은 현지 말로 대체했다. 4월 14일 새벽 3시, 타레톤은 몽크 코너에 자리잡은 대륙군 숙영지를 야습해 적을 단숨에 패주시키고 적의 마차와 보급품과 함께 부하들이 제대로 탈 수 있는 말들을 충분히 포획했다. 이후 영국군은 쿠퍼 강의 동쪽 둑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찰스턴에서 6마일 이내까지 내려가 대륙군의 탈출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참호는 4월 19일까지 대륙군 방어선에서 250야드 이내 거리까지 나아갔다. 이에 링컨은 다시 전쟁 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는 찰스턴을 버리고 후퇴하거나 적에게 항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게즈덴 중령은 주민들이 대륙군에 의지할 거라면서 두 가지 제안 모두 강하게 반대했다. 링컨은 위원회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접었지만 독자적으로 영국에게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찰스턴을 떠나게 해달라는 조건에 대해 단호히 거부했다. 이튿날 밤 대륙군은 영국군의 포위선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영국군은 역습을 가해 몰트리 요새를 공략했다. 5월 8일, 영국군 참호는 대륙군 방어선에 매우 근집했고, 대륙군이 파놓은 도랑은 때마침 장대비가 내리면서 금방 메워졌다. 클린턴은 전면적인 총공격에 앞서 대륙군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링컨 소장은 영국군이 쿠퍼 강의 동쪽 둑과 애슐리 강의 서쪽 둑을 점령하고 영국 해군이 찰스턴 하구를 장악한 상황에서 저항해 봐야 별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링컨은 장교들을 설득해야 하니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링컨은 5월 9일까지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링컨은 민병대가 석방되고 대륙군 정규병들이 명예롭게 항복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클린턴은 이 제안 역시 거부했다. 이튿날 밤, 양측은 대포로 서로의 진영을 포격했다. 찰스턴 주민들은 갈수록 마을의 피해가 커지자 링컨에게 항복할 것을 청원했다. 결국 링컨은 민병대가 그들의 무기를 포기하고 더잇아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맺고 귀가할 것과 대륙군 정규병 전체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명시한 영국 측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다. 5월 12일, 대륙군은 그들의 무기를 버린 후 영국군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민병대는 뒤따라 총기를 넘겨주고 다시는 [[조지 3세]]를 상대로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귀가했다. 이리하여 찰스턴 공방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